산세바스티안의 한 달 살이는 프리랜서로 자유가 된 나에게 가장 먼저 준 선물이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바뀐 건 시간을 쓰는 방식이었습니다.
정해진 휴가 일수에 맞춰 일정을 쪼개던 습관이 사라지고 나니, 한 달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어딘가에 써도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고른 곳이 산세바스티안이었습니다.
유럽 여행기를 찾아보다 우연히 사진 몇 장을 보고 마음이 기울었는데, 막상 도착해서는 사진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조금 얼떨떨했던 기억이 납니다.

계피향 가득 모닝커피
숙소는 구시가지, 그러니까 파르테 비에하 근처 좁은 골목에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창을 열면 옆 건물 빨래 너는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감이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며칠이 지나자 오히려 그 소음이 아침을 깨우는 신호처럼 익숙해졌습니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한 일은 동네를 한 바퀴 걷는 것이었습니다.
출근이 없는 하루를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게 처음엔 이상하게 어색했는데, 그 어색함이 사라지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골목 초입에 있던 작은 빵집에서 매일 같은 빵을 사 먹었습니다.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며칠 뒤부터는 제가 들어서기만 해도 알아서 그 빵을 봉투에 담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누군가 저를 기억해 준다는 게 이렇게 단순한 위안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프리랜서의 일이라는 게 결국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이어갈 수 있는 것이라, 저는 매일 다른 카페를 찾아다니며 일했습니다.
구시가지의 좁은 카페는 자리가 늘 부족해서 창가 자리 하나를 차지하려면 오전 일찍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침 일찍 움직여서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차지하고 마시는 카푸치노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계핏가루를 마지막에 뿌려주는데 이곳의 카푸치노는 계피로 미리 진액을 만들어두고 커피와 같이 섞어주는 방식을 쓰는 카페가 많았습니다.
평소에 계피, 박하와 같이 입이 화한 주전부리를 좋아하는 저에게 딱 맞는 모닝커피였습니다.
반면 신시가지 쪽, 그러니까 강 건너 콘차 만이 보이는 동네의 카페는 좌석이 넉넉해서 느긋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좁고 시끄러운 곳과 조용하고 트인 곳을 오갔던 것 같습니다. 일하다 지치면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정장을 입고 바삐 걷는 사람보다 유모차를 끌고 천천히 걷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제가 서울에서 얼마나 쫓기듯 살았는지 새삼 실감이 났습니다.
다만 와이파이가 불안정한 카페를 두어 번 잘못 골라서 마감 직전에 애를 먹은 적도 있었는데, 그건 지금 생각해도 조금 아찔한 기억입니다.
역시 한국이 IT 강국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요리 실력이 늘은 이유
한 달이나 머무는 이상 매끼를 밖에서 사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숙소에 작은 부엌이 딸려 있어서 저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브레차시장에 들러 장을 봤습니다.
처음엔 생선 이름도 채소 이름도 몰라서 그저 눈으로 보고 신선해 보이는 것을 골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인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됐습니다.
한 생선 가게 아저씨는 제가 매번 같은 종류만 사가니까 다른 걸 손짓으로 추천해주기도 했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장을 보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시장에서 산 재료로 서툰 요리를 해 먹는 저녁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요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낯선 재료를 눈앞에 두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시간이 의외로 하루 중 가장 마음이 편안한 순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저의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던 것 같습니다.
산세바스티안에서 살기 전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요리는 라면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마저도 물조절과 끓이는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해 면이 퉁퉁 불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신선한 야채와 생선을 요리 전 바로 구매했기 때문에 소금만 뿌려도 맛있었고 제가 한 요리에 감탄하여 더 열심히 요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산세바스티안 하면 핀초스를 빼놓을 수 없다고들 하는데, 저 역시 저녁이면 습관처럼 좁은 바 골목으로 향했습니다.
혼자 바에 서서 접시를 받아 드는 일이 처음에는 어색했습니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서 혼자 조용히 먹고 마시는 사람은 저뿐인 것 같아 괜히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오히려 그 시간이 하루 중 유일하게 아무 생각 없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낯선 언어의 대화를 배경음악처럼 흘려들으며 접시 하나씩 비워가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몇몇 바는 유독 사람이 몰려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런 날은 골목을 조금 더 걸어 한적한 바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적다고 해서 맛이 덜한 것도 아니어서, 굳이 유명하다는 곳만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콘차 해변에서 보낸 늦은 오후
일을 마치고 나면 저는 자주 라콘차 해변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계절이 여름은 아니어서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해안선을 따라 걷거나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저도 그 틈에 끼어 별다른 목적 없이 앉아 있곤 했습니다. 일이라는 걸 완전히 손에서 놓은 채 그렇게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으면,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제가 정말로 원했던 게 이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날이 맑은 저녁에는 몬테이겔도 쪽 언덕까지 올라가 해가 지는 걸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숨이 좀 찰 정도로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그만큼 위에서 내려다보는 만의 풍경이 오래 눈에 남았습니다.
다만 구름이 낀 날에 무리해서 올라갔다가 아무것도 못 보고 내려온 날도 있었는데, 그날은 괜히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떠날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저는 오히려 일정을 줄이고 그냥 동네를 걷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기보다 이미 익숙해진 골목과 카페와 시장을 한 번 더 들르는 쪽을 택했습니다.
빵집 아주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을 때, 며칠 안 보이면 서운해할 뻔했다는 말을 서툰 영어로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숙소를 정리하며 캐리어를 싸던 밤, 이곳에서 보낸 한 달이 특별한 사건 없이 그저 조용히 흘러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저에게는 가장 필요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강과 다리를 보면서 이 도시를 다시 찾을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노트북 하나와 시장바구니 하나로 채웠던 그 평범한 하루들만큼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산세바스티안을 생각하면 무해하고 어지러웠던 머릿속과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산세바스티안의 일상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고 프리랜서로서의 여정을 순탄하게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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