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로 인기가 많은 발렌시아이지만 저는 여행과 거리가 먼 회사와 컨퍼런스 기억이 먼저 납니다.
회사 워크숍 일정으로 스페인 발렌시아에 간 것은 순전히 업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전체가 분기마다 오프사이트로 모이는 자리였고, 장소가 발렌시아로 정해졌을 때 팀원들 사이에서는 파에야와 축구 이야기가 먼저 나왔습니다.
저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이런 해외 워크숍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낯설어서, 일정표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착한 첫날은 시차 때문인지 컨퍼런스룸 냉방 때문인지 계속 몸이 무거웠고, 발표 자료를 넘기면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야자수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호텔 로비에 모여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던 첫날 밤에는, 낯선 도시라는 실감보다 회의 뒤풀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동료들과 파에야를 처음 맛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 날 발표 순서를 되짚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자유시간을 즐기는 길
이틀에 걸친 세션과 발표가 끝나고, 마지막 날 오후는 개인 시간으로 비어 있었습니다.
팀원들은 저마다 흩어졌고, 저는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구시가지 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회의실에서 온종일 화면만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낯선 골목 한가운데 서 있으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노트북 가방 대신 작은 크로스백 하나만 메고 나선 그 순간이 이번 출장에서 가장 홀가분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팀장님께는 저녁 회식 전까지 자유롭게 돌아다니겠다고 미리 말씀드려 두었습니다. 지도 앱을 켜놓긴 했지만 굳이 경로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골목이 갈라질 때마다 그냥 사람이 더 많은 쪽으로 걸었습니다.
회사 워크숍으로 온 도시에서 이렇게 목적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저는 원래 무서움도 많고 모험을 두려워하는 성격입니다.
평소엔 관광지를 혼자 돌아다니는 걸 잘 안 하는 성격인데 이번만큼은 일에 너무 지쳐있어서인지 그냥 혼자걷지 않으면 안될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였던거 같습니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예술과학도시가 있다는 이야기를 동료에게 듣고 무작정 방향을 잡았습니다.
흰색의 거대한 구조물들이 마른 강바닥 위에 늘어서 있는 모습은 사진으로 봤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건축물 하나하나가 다른 행성에서 옮겨온 것처럼 낯설었고, 그 앞에 서 있으니 오전 내내 붙잡고 있던 발표 자료 화면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오페라하우스 형태의 건물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절반은 초점이 나가 있었습니다.
아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그 시간을 꽉 채워서 머릿속을 비워야 겠다는 생각이 강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얕은 수로에 물이 잔잔하게 고여 있었고, 그 위로 흰 구조물이 그대로 비쳐서 마치 하늘과 물이 같은 색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워크숍 내내 쌓였던 긴장이 그제서야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과학박물관 안쪽까지 들어가 볼 시간은 없었습니다.
워크숍 이후 저녁 일정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는 숙소로 돌아가야 했고, 그래서 외관만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 안까지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 지금도 살짝 마음에 걸립니다.
중앙시장의 오렌지 냄새
예술과학도시에서 나와 다시 구시가지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에 중앙시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렌지와 신선한 생선 냄새가 동시에 훅 끼쳐왔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상인들이 스페인어로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해도, 손짓과 표정만으로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몽이 통째로 매달려 있는 가판대 앞에서는 한참을 서서 구경했습니다.
워크숍에서 만난 동료 한 명과 우연히 그곳에서 마주쳤는데, 회의실이 아닌 곳에서 만나니 괜히 웃음이 났습니다.
상황이 회사 근처에서 각자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야근을 위해 회사로 커피하나 들고 들어가는 길에 만난 동료같은 느낌입니다.
아마 그 동료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낮선곳에서 친근한 사람의 만남보다는 그냥 서로 알고 있는 길에서 만난 그런 표정이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서로 자유시간을 즐기고 이따 만나자고 인사를 가볍게 나누었습니다.
저는 바로 시장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이국적인 분위기 자체도 인상 깊었습니다.
철골과 유리로 된 천장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아래로 온갖 색깔의 과일과 채소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온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회사에서 준비해 준 일정표에는 물론 이런 시장 이름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시장 근처 작은 노점에서 오렌지주스를 한 잔 사서 마셨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그 한 잔이 그날 오후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고 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손에 쥔 컵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시장 앞 계단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지금도 발렌시아를 생각하면 그때의 그 오렌지주스 향기가 나는 듯 합니다.
사실 그 주스는 비싼 과육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싸구려 시럽으로 대충 맛을 낸 설탕음료나 다름없었으나 저에게는 발렌시아의 모든 향과 추억이 있는 냄새입니다.
시장을 나와서는 발렌시아 대성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성당 안에 성배로 알려진 잔이 보관되어 있다는 설명을 동료에게 전해 듣고 들어가 보았는데, 화려하다기보다는 오래된 돌 냄새와 서늘한 공기가 먼저 다가왔습니다.
관광객들 사이에 섞여 조용히 안쪽을 둘러보다가, 이런 곳에 혼자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성당 앞 광장에서는 오래된 분수 주변으로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근처 골목의 실크 거래소로 쓰였다는 건물 외벽을 지나가면서, 안까지 들어가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눈에 담고 지나쳤던 것도 두고두고 아쉬웠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넉넉하게 잡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워크숍 일정에 맞춰 짠 하루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투리아 정원에서 산책
성당 근처 골목을 빠져나와서는 투리아 정원까지 걸어갔습니다.
원래 강이 흐르던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긴 녹지가 이어진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조깅하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회사 워크숍이라는 목적으로 왔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습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풍경이 유독 마음에 남았습니다.
공원 한쪽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데, 옆에서 스페인어로 시끄럽게 떠들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습니다.
회사 메신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가도, 오늘만큼은 그냥 넘기기로 합니다.
그런 결정을 내린 제 자신이 낯설면서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무슨말인지 스페인어라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까르륵 웃으며 노는 아이들을 보고있자니 마냥 행복했습니다.
어느나라건 아이들은 나라의 보물이고 귀중한 생명력을 지닌것 같습니다.
저의 축쳐진 어깨와 엉클어진 멘탈을 쓰다듬어 주니까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일부러 큰길이 아니라 좁은 골목들을 골라 걸었습니다.
저녁 준비를 시작하는 식당들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와 소리가 골목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노트북을 열고 발표 자료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치자, 그 짧았던 오후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워크숍 때문에 온 도시에서 이렇게 다른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녁 회식 자리에서 동료들에게 낮에 걸었던 길 이야기를 꺼내니, 다들 각자 다른 곳을 다녀온 이야기를 풀어놓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누군가는 해변까지 다녀왔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냥 호텔 수영장에서 쉬었다고 했습니다. 같은 도시, 같은 반나절인데 저마다 다른 발렌시아를 만나고 온 셈이었습니다.
그날 밤, 호텔 창밖으로 어두워지는 발렌시아 시내를 내려다보면서도 낮에 걸었던 골목들이 계속 눈에 밟혔습니다.
회의 자료보다 오렌지주스 한 잔의 온도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줄은, 그때는 몰랐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오렌지주스를 마실때면 가끔 그때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일에 찌들어있을때 발렌시아 시장 노점 오렌지주스는 나를 다시 일으키는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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