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졸업하고 어렵게 회사에 입사한 지 반년 남짓 지났을 때였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주말이 와도 딱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곳이 강원도였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바다를 보면 뭔가 정리가 될 것 같았습니다.
이번 여행은 신입 사원이라 눈치가 보여 연차는 엄두도 못 냈고, 주말 이틀을 쪼개서 다녀오는 일정이었습니다.
금요일 퇴근 후 곧바로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강변역으로 갔습니다. 강변역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이 바로 붙어있는데 강원도행 노선이 많이 있는 곳입니다. 무작정 터미널로 가서 표 사는 곳에서 행선지를 훑어보다 발견한 것이 속초였습니다.

추억 속 14시간의 먼 거리
속초는 제가 국민학교 때 친할아버지가 사셨던 곳인데 방학, 명절 때마다 갔던 곳입니다.
그때는 양양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이였기 때문에 고불고불한 대관령이나 미시령 고개를 넘어야 갈 수 있었는데, 산길이 험하다 보니까 갈 때마다 차에서 멀미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막혀도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그때는 명절 때 막힐 때에는 14시간까지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어렸기 때문에 뒷자리에서 엄마가 주는 간식 먹으며 자고 책 보고 편하게 갔는데, 그 시절 아빠가 14시간 쉬지 않고 운전했을 걸 생각하면 그때의 부모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버스에 오르자마자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는데, 한 주 동안 쌓인 피로 때문인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밖 풍경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도심의 건물들 대신 산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터미널에 내려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바다 냄새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바다 냄새라는 표현을 그냥 관용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코끝에 와닿는 짠 내음이 있었습니다.
숙소는 해변 근처의 작은 모텔이었습니다. 화려한 곳은 아니었지만 창문을 열면 바로 파도 소리가 들려서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구경만으로 배부른 시장
짐을 풀고 나니 저녁 시간이 되어 중앙시장으로 걸어갔습니다. 혼자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어서 시장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조금 당황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일행이 있는데 저만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배는 고팠기 때문에 닭강정 가게 앞에 줄을 섰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옆에 계신 아주머니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셔서 서울에서 혼자 왔다고 하니 대단하다며 웃어주셨는데, 그 짧은 대화가 이상하게 위로가 됐습니다. 닭강정은 매콤 달콤한 냄새부터 자극적이었고, 걸어 다니면서 먹기에 딱 좋은 양이었습니다.
여기 닭강정은 너무 유명해서 저희 동네 롯데백화점 지하 식품관에서도 종종 팝업스토어로 판매하는데 그때마다 저는 가서 꼭 사 온답니다.
시장을 더 돌아다니다가 씨앗이 콕콕 박힌 호떡도 하나 사서 손에 들고 걸었습니다.
속초의 시장을 동네에 있는 그런 일반 시장이 아닙니다. 관광지를 집약해 놓은 듯한 강원도의 모든 음식이 다 담겨있습니다. 구경하는데만 1시간은 넉넉히 필요할 정도로 규모도 큽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일부러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평소 회사 다닐 때는 알람을 몇 번씩 미루면서 겨우 일어나는데, 그날은 알람도 없이 저절로 눈이 떠졌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해변으로 나가니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파도 소리만 들리는 모래사장을 혼자 걷는데 뭔가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있었던 자잘한 일들, 상사한테 들었던 말 한마디 같은 것들이 파도 소리에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가을동화 속 아바이마을
아바이마을에는 오전 늦게 도착했습니다. 갯배를 타고 건너가는 짧은 구간이었는데, 배를 직접 밧줄로 당겨서 이동한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관광객이 직접 밧줄을 잡고 당겨볼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저도 서툴게 손을 얹어봤는데,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가서 금방 손을 놓았습니다.
마을에 들어서니 오징어순대 냄새가 골목마다 퍼져 있었습니다. 예전 피란민들이 정착해서 만들어진 동네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나서, 골목을 걸으면서 그런 배경을 떠올리니 그냥 지나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아바이마을하면 가을동화가 먼저 떠오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너무 인기 많았던 드라마였는데 여자 주인공이 사는 가난한 동네가 바로 아바이마을을 배경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영상에 비치는 그림이 너무 예뻤기 때문에 그때 당시 수능이 끝나면 바로 저기부터 가야겠다고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미리 여행일정까지 짰던 것이 생각납니다.
막상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나고 나서 바로는 속초 아바이마을을 오지 못했습니다. 여행 계획을 짰던 멤버 중 한 친구가 수능 시험을 망쳐서 바로 대학교 입학을 하지 못하고 재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아쉬웠던 부분은 설악산까지는 가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일정이 워낙 짧다 보니 욕심을 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면 그때는 꼭 가봐야겠다고 속으로 다짐만 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오후에는 영금정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정자에 앉아서 부딪히는 파도를 한참 바라봤는데, 딱히 뭘 하지 않고 그냥 바다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잘 갔습니다.
평소 같으면 스마트폰을 계속 들여다봤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등대 근처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근처 벤치에 앉아 한참을 쉬었습니다. 돌아가는 버스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습니다. 다시 월요일이 되면 똑같은 자리, 똑같은 업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실감이 났기 때문입니다.
터미널로 걸어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바다를 한 번 더 돌아봤습니다.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으니 창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바다가 보였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는데 이상하게 후련한 기분과 아쉬운 기분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겨우 이틀 다녀온 여행이었는데도 뭔가 하나를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가끔 일이 힘들 때면 그 새벽 해변의 파도 소리가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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